미리보기 · 시즌 2 · G03 · EP 5
선한 사마리아인의 원리
예수님께서 한 율법사에게 질문을 되돌리신 장면은 신앙의 좌표를 뒤흔드는 순간이다. 누구를 이웃이라 부를 것인가가 아니라, 누가 이웃이 되었는가를 물으신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0:36-37율법사는 이웃의 경계를 묻고 싶었다. 어디까지가 내가 사랑해야 할 범위인가. 그러나 예수님은 경계의 지도를 그려주시는 대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곁에 무릎 꿇은 한 장의 그림을 보여주신다. 이웃은 정의되는 명사가 아니라, 살아내는 동사였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 협곡이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은 우연이었고, 그 곁을 스쳐 간 제사장과 레위인도 우연이었으며, 멈춰 선 사마리아인의 발걸음도 우연이었다. 선택하지 않은 만남, 그것이 이웃의 자리다. 우리가 가족·친구·동료라 부르는 친밀권은 이미 선택된 관계의 그물 안에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그물 바깥의 낯선 자, 길 위에 쓰러진 모르는 자를 향해 우리를 부르신다.
사마리아인이 멈췄을 때, 그는 종교적 자격도 민족적 동질감도 없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오랜 적대의 역사를 짊어진 두 진영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멈췄다. 거리도 혈연도 신앙적 공감대도 이웃을 결정하지 못했다. 오직 자비를 베푼 그 손길이 그를 이웃으로 만들었다.
구약은 이미 이 진실을 속삭이고 있었다.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레위기 19:34). 이스라엘은 자기 백성의 울타리 안에 사랑을 가두려 했지만, 율법은 이미 그 울타리를 허물고 있었다. 미가 선지자도 외쳤다.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8).
요한일서는 이를 더 단호히 못박는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한일서 3:17). 이웃 됨은 감정이 아니라 닫힌 마음을 여는 행동이다. 사마리아인은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부었고, 자기 짐승에 태웠고, 주막에 데려갔다. 동사가 연속되었다. 이웃은 그 동사의 끝에서 비로소 호명된다.
오늘 우리에게 여리고 길은 어디인가. 출근길 지하철의 쓰러진 노인, 뉴스 한 줄로 흘려보내는 재난의 피해자, 같은 아파트 복도에서 마주쳐도 이름 모르는 옆집의 고독. 친밀권을 넘어 외연으로 한 발 내딛는 그 자리가 이웃이 태어나는 자리다. 디지털 시대에는 화면 너머의 낯선 이까지도 우리 곁으로 흘러 들어온다.
"누구를 사랑해야 합니까"라고 묻지 말라. 길 위에서 멈출 수 있느냐고 자신에게 물으라. 멈춤이 곧 이웃의 시작이다.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은 짧고 무겁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웃은 정의되는 자가 아니라, 되어가는 자다.
묵상 질문
1. 최근 나의 길 위에서 스쳐 지나간 '강도 만난 자'는 누구였는가. 나는 제사장처럼 비켜갔는가, 사마리아인처럼 멈췄는가.
2. 내가 이웃이라 부르는 사람들의 명단은 얼마나 좁은가. 그 울타리 바깥의 누구를 향해 한 걸음 내딛을 수 있겠는가.
3. '자비를 베푼 자'라는 호칭이 나의 이름 뒤에 붙으려면, 오늘 어떤 동사를 살아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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