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 시즌 2 · G02 · EP 9
목회의 본질을 묻다
강단은 단순한 무대가 아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입술을 빌려 선포되는 거룩한 접점이며, 설교자의 땀과 눈물, 무릎 꿇은 밤과 회개의 새벽이 쌓여 만들어진 자리다. 그런데 이 자리에 알고리즘이 올라설 수 있을까. 방대한 신학 자료를 학습한 인공지능이 완벽한 문장으로 본문을 풀어내고, 원어 분석과 교부들의 주석까지 순식간에 제시한다면, 그것은 설교라 부를 수 있는가.
우리는 종종 설교를 잘 정리된 강의로 착각한다. 그러나 설교는 본질적으로 증언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자신이 겪은 은혜의 실체를 입술로 토해내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3이 한 구절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다. 옥중에서, 매 맞은 등으로, 굶주림과 풍족함을 모두 통과한 사도의 상처 난 몸이 내뱉은 고백이다. AI는 이 구절을 암기하고 해설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의 쇠사슬을 대신 찰 수는 없다. 증언은 지식이 아니라 삶에서 길어 올려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설교의 원형은 요한복음 1장에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한복음 1:14). 하나님은 원리만을 선포하지 않으셨다.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걸어 들어오셨다. 목수의 손에 박힌 못자국, 베드로를 바라보던 눈빛,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흘리신 눈물 – 복음은 처음부터 살아 있는 몸의 이야기였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사랑은 데이터가 아니라 내어줌이다. 독생자를 내어주신 아버지의 가슴을 알고리즘이 어떻게 복제하겠는가. 시편 기자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편 23:1)라고 노래했고,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28)고 선언했다. 이 말씀들이 힘을 갖는 이유는 한 영혼이 어둠의 골짜기를 실제로 통과했기 때문이다.
기술이 설교단까지 올라온 시대, 교회는 "AI가 설교할 수 있는가"보다 더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우리의 설교는 과연 살아 있는가. 오래 전 선지자 에스겔은 마른 뼈 골짜기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에스겔 37:9). 설교단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생기다.
알고리즘은 완벽한 문장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눈물로 적셔진 한 줄은 만들지 못한다. 강단이 거룩한 이유는 화려한 언어 때문이 아니라, 그 자리에 선 사람의 무너진 무릎 때문이다.
오늘 우리의 예배 자리를 돌아보자. 우리는 설교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잘 정리된 논리인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숨결인가. AI의 등장은 교회에 던지는 거울이다. 우리의 강단이 이미 오래 전부터 영혼 없는 정보로 채워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이 시대는 아프게 묻고 있다.
묵상 질문
1. 나는 설교를 들을 때 '정보'를 얻으려 하는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증언'을 듣고자 하는가?
2. 내 신앙 고백은 책에서 배운 것인가, 삶의 골짜기를 통과하며 빚어진 것인가?
3. AI가 아무리 정교해져도 결코 대신할 수 없는 '내 삶의 증언'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