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 시즌 2 · G09 · EP 7
사명 위임의 원리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락방에 들어오셨습니다. 닫힌 문을 지나,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 한가운데로. 그분의 첫 인사는 평강이었고, 두 번째 말씀은 위임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한복음 20:21이 한 문장이 본 권의 무게중심입니다. 짧지만 신학의 강 하나가 이 구절에서 발원합니다. 보내심은 천사만의 일이 아닙니다. 사도만의 일도 아닙니다. 한 신학으로 흐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고, 아들이 성령을 보내시며, 아들이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같은 원리 — 위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흐름을 시간 안에 배치합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라디아서 4:4-6). 보내심은 영원 속의 결정이 시간 속으로 흘러내리는 일입니다. 한 줄기로, 한 방향으로.
고대 왕의 친서를 생각해 봅시다. 양피지 한 장에 무슨 권위가 있겠습니까. 그 종이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인장이 무거운 것입니다. 밀랍 위에 찍힌 왕의 문장(紋章) 하나가 그 편지를 국경 너머까지 통하게 합니다. 사신은 자기 이름으로 서지 않습니다. 그를 보낸 왕의 이름으로 섭니다.
보내심의 원리가 이와 같습니다. 보낸 분의 권위가 보냄받은 자의 권위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마태복음 28:18-19). 권세를 받으신 분이, 받은 그 권세 위에서 보내십니다. 제자들은 자기 권위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인장을 지니고 가는 것입니다.
천사도 같은 원리 안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히브리서 1:14)라고 묻습니다. 천사 역시 보내심을 받습니다. 사도(아포스톨로스)라는 헬라어 단어 자체가 '보냄받은 자'를 뜻합니다. 천사·그리스도·사도가 다른 신학이 아니라 한 신학의 다른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어디에 섭니까. 보내심의 강 한가운데 섭니다. 직업이 무엇이든, 자리가 어디든, 보냄받은 자로 섭니다. 문제는 자주 우리가 자기 이름으로 서려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격, 자기 능력, 자기 성과로. 그러나 인장이 없는 편지는 아무리 화려해도 통하지 않습니다.
대사는 본국의 권위로 서고, 사신은 왕의 인장으로 말합니다. 보냄받은 자의 무게는 보낸 분에게서 옵니다.
월요일 아침의 일터, 가정의 식탁, 낯선 이웃 앞에서 자기 이름으로 버티려 할 때 우리는 곧 지칩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음성이 들려올 때, 그 자리에 인장이 찍힙니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그 흐름의 첫 출발 —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 — 으로 거슬러 올라갈 것입니다.
묵상 질문
1. 나는 오늘 어느 자리에서 '자기 이름'으로 서려 하고 있습니까? 그곳에 보낸 분의 인장이 찍혀 있다고 믿어집니까?
2. 아버지·아들·성령·신자로 이어지는 한 보내심의 강 속에서, 나의 위치를 어떻게 고백하겠습니까?
3. 보냄받은 자의 권위가 보낸 분의 권위라면, 내 사역과 일상에서 무엇이 달라져야 합니까?
여기까지가 미리보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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