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 시즌 2 · G01 · EP 8
상호 영광 주고받음
요한복음 17장 다락방의 마지막 기도, 그 한가운데서 예수께서 아버지를 향해 이렇게 아뢰신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5이 한 구절 안에 시간의 강물이 거꾸로 흐른다.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는 성자께서 창세 이전의 자리를 회상하시는 것이다. 거기에는 빛도 어둠도, 천사도 인간도 없었다. 오직 성부와 성자, 그리고 두 분 사이를 잇는 성령. 세 위격이 서로의 얼굴 안에서 서로를 비추던 영광의 자리가 있었다.
창세 전 삼위의 교제를 그려볼 한 가지 이미지가 있다. 세 거울이 서로를 마주 비치는 장면이다. 한 거울에 빛이 비치면 다른 두 거울이 그 빛을 받아 되돌려 보낸다. 빛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셋 사이를 끝없이 오간다. 세 거울이 가까이 마주 설수록 반사는 깊어지고, 빛은 무한히 증폭된다. 그 영광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이 그림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있다. 성부의 영광은 결코 자기 안에 갇힌 영광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부는 성자에게 영광을 부어 주시고, 성자는 그 영광을 다시 성부께 돌려 드린다. 그리고 성령은 이 둘 사이를 잇는 살아 있는 사랑으로, 성자를 영화롭게 하신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
요한복음 16:14성령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심으로 영광을 이루신다. 셋 모두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을 가리킨다. 이것이 영광의 본질이다. 영광은 받기 위해 빼앗는 것이 아니라, 주기 위해 비우는 자리에서 솟아난다.
잠언의 한 구절은 창세 전의 정경을 우리에게 살짝 보여 준다.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잠언 8:30여호와의 곁에서 날마다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는 한 분이 계셨다. 거기에는 외로움이 없었다. 자기 자랑도, 자기 증명도 필요 없었다. 서로 향한 송영만이 흘러넘쳤다. 만물이 지어지기 전에 이미 사랑은 완전했고, 영광은 충만했다.
그러므로 창조는 결핍의 산물이 아니라 충만의 흘러넘침이다. 세 위격은 부족해서 세상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너무 가득해서 그 사랑을 나눌 손님을 초대하신 것이다. 이사야의 음성도 같은 자리를 가리킨다.
"내가 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이사야 43:7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관계는 이 창세 전 영광의 자리에서 원형을 찾는다. 부부가 서로 영화롭게 하고, 부모와 자녀가 서로 빛나게 하며, 친구가 친구의 자리를 키워 줄 때, 우리는 알지 못한 채 삼위의 무한 반사를 흉내 내고 있는 것이다.
오늘 한 사람을 떠올려 보라. 가장 가까운 사람일수록 좋다. 그 사람 앞에서 나는 거울이 되어 주는 사람인가, 거울을 깨뜨리는 사람인가. 내가 그의 좋은 점을 비추어 줄 때, 그도 내 빛을 비추어 준다. 그렇게 우리 사이에도 작은 반사가 시작된다.
영광은 빼앗는 자의 것이 아니라, 주는 자에게서 시작되어 주는 자에게로 돌아간다.
묵상 질문
1. 창세 전 성부와 성자가 함께 누리신 영광의 자리를 그려 본다면, 내 마음에는 어떤 그림이 떠오르는가?
2. 나는 가까운 사람의 영광을 비추어 주는 거울인가, 아니면 내 영광만을 비추기를 바라는 거울인가?
3.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심으로 성자를 영화롭게 하시는 성령의 방식이, 오늘 내 관계 안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