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 시즌 2 · G01 · EP 6
창조·구속·성화
고린도 교회는 은사의 풍성함을 자랑하면서도 분열했다. 같은 성령이 주신 선물을 두고 누가 더 크냐를 다투었고, 같은 주의 이름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서로를 정죄했으며, 같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의 이름으로 갈라놓았다. 바울은 이 혼란의 한복판에 한 본문을 박아 놓는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고린도전서 12:4-6세 번 반복되는 "여러 가지나"와 세 번 울리는 "같다"는 선언. 바울은 다양성과 통일성을 동시에 못 박는다. 은사(카리스마타)는 성령께, 직분(디아코니아)은 주께, 사역(에네르게마타)은 하나님께 귀속된다. 그러나 세 주체는 셋이 아니다. 한 작품을 함께 빚는 세 장인의 손길처럼, 손은 다르나 의지는 하나다.
고대 교회는 이 신비를 사역 귀속(appropriations)이라 불렀다. 창조는 성부께, 구속은 성자께, 성화는 성령께 돌린다. 사도신경의 흐름도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분업이 아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현장에 이미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세기 1:2)는 음성이 들리고, 골로새서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골로새서 1:16)되었다고 그리스도를 창조의 중심에 놓는다. 구속의 골고다에는 성부의 뜻과 성령의 능력이 함께 있었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화의 시간에도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피가 동시에 일한다.
신학은 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대외적 사역은 나누어지지 않는다. 밖을 향한 모든 일은 세 위격이 함께 하시되, 각 위격의 고유한 빛깔이 드러난다. 마치 한 멜로디를 세 악기가 함께 연주할 때, 각 악기의 음색은 다르지만 곡은 하나인 것과 같다.
이 구분이 흐려지면 신앙은 한쪽으로 기운다. 성부만 강조하면 신앙은 차가운 도덕 종교가 되고, 성자만 붙들면 십자가 감상에 머무르며, 성령만 좇으면 체험의 파도에 휩쓸려 말씀에서 떠밀린다. 반대로 세 분의 한 의지를 붙들면, 우리는 창조의 질서를 존중하고, 구속의 은혜에 무릎 꿇으며, 성화의 능력에 자신을 내어드리는 균형 잡힌 자리에 선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명기 6:4). 셋이라 부르되 결국 한 분을 부른다. 다양한 은사의 한복판에서도 우리가 향해 서는 분은 한 분이시다.
실생활은 어떤가. 봉사부서에서 누구의 은사가 더 빛나느냐 다투던 마음, 찬양과 말씀과 구제를 우열로 줄 세우던 시선, "나는 성령의 사람" "너는 말씀의 사람"이라 갈라 부르던 습관—이 모든 분열은 같은 뿌리에서 자란다. 한 분이심을 잊은 것이다. 베드로는 권면한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베드로전서 4:10). 다름은 자랑이 아니라 청지기 직분이다.
묵상 질문
1. 나는 삼위 가운데 어느 한 분께만 치우쳐 신앙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어느 분의 사역을 가장 자주 잊는가?
2. 내가 받은 은사·직분·사역의 자리에서, 그것을 "나의 것"이 아닌 한 의지에서 흘러나온 선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3. 공동체 안에서 다른 이의 다른 빛깔을 우열로 비교했던 순간이 있다면, 오늘 그 시선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