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 시즌 2 · G01 · EP 5
영원 전의 삼위 교제
막이 오르기 전, 객석은 어둡고 무대는 비어 있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 이미 한 합창이 울리고 있었다. 시간이 시작되기 전, 공간이 펼쳐지기 전, 별 하나도 빛나기 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를 향한 사랑의 음을 영원토록 주고받고 계셨다. 사도 바울은 그 영원의 무대 뒤편을 한 문장으로 들어 올린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에베소서 1:4"창세 전(前)"이라는 단어 앞에서 우리의 사고는 멈춰 선다. 그것은 시계가 멈춘 자리가 아니라, 시계 자체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자리다. 그 영원의 정적 속에 이미 우리의 이름이 호명되고 있었다는 선언, 이것이 본 권의 첫 음이다.
창조는 정적 가운데 갑작스레 터진 폭발이 아니었다. 그 이전부터 삼위 안에는 영원한 교제와 영광의 흐름이 있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5아들은 시작점에서 출발하신 분이 아니라, 시작 이전에 이미 영광 가운데 계셨던 분이다. 잠언의 지혜는 이 영원의 풍경을 다른 음색으로 노래한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잠언 8:22). 창조 이전에 이미 관계가 있었다. 하나님은 외로움 때문에 우주를 만드신 분이 아니다. 충만한 사랑의 흐름 안에서, 그 사랑을 나누어 누리도록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택하사"라는 동사는 시간 안에서 우연히 발견된 우리를 가리키지 않는다. 막이 오르기 전, 무대 위에 한 사람의 배역도 등장하기 전, 아버지의 손에는 이미 명단이 들려 있었다. 그 명단의 자리는 그리스도 안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가능성 때문에 선택되지 않았고, 아들 안에 감추어진 채로 선택되었다. 디모데후서는 이 신비를 다시 들려준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디모데후서 1:9그러므로 우리의 존재는 시간 속의 우연이 아니라 영원 속의 약속이다. 예레미야가 들은 음성도 같은 합창의 일부였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예레미야 1:5).
이 진리는 신학의 천장을 높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오늘 아침 거울 앞에서 자신을 미워한 사람,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느라 지친 사람, 누구의 명단에도 들지 못한 듯 외로운 사람에게 이 합창은 직접 닿는다. 당신은 막이 오른 뒤에 황급히 끼워 넣은 단역이 아니다. 막이 오르기 전부터 부르신 음에 응답하도록 지어진 한 성부의 자녀다.
오늘 하루 어떤 평가를 받든, 그 평가보다 먼저 울린 이름이 있다. 그 이름이 당신의 진짜 이름이다.
실생활에서 이 진리를 누리는 길은 단순하다. 아침의 첫 1분, 일터로 들어가기 전, 잠자리에 들기 전, 짧게 멈춰 고백해 보라. "나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자입니다." 자기 가치 증명의 굴레가 풀리고, 이미 들려진 합창 안으로 한 음이 더해진다. 시편 기자가 노래한 그 자리,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편 23:1)의 평안이 시간 너머에서 오늘로 흘러든다.
묵상 질문
1. "창세 전에 택함 받았다"는 선언이 오늘 나의 자기 평가와 어떤 지점에서 가장 크게 충돌하는가?
2. 시간 안의 성취로 내 가치를 증명하려 할 때, 시간 이전에 이미 울린 합창을 어떻게 다시 들을 수 있을까?
3. 삼위의 영원한 사랑의 교제 안으로 초청받았다는 사실이 오늘 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