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 시즌 2 · G01 · EP 3
떠남과 오심의 신비
예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에게 남기신 말씀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한 마디가 있다. 떠나는 것이 곧 유익이라는 역설이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한복음 16:7제자들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삼 년을 함께 걷고 먹고 잠들었던 스승이 떠난다고 하니, 그것이 어떻게 유익일 수 있는가. 그러나 예수의 말씀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구속사의 거대한 경첩이 돌아가는 소리였다. 떠남은 끝이 아니라 더 큰 오심을 여는 문턱이었던 것이다.
성자의 떠남과 성령의 오심은 두 개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이다. 마치 한 사람이 들고 있던 횃불을 다른 사람의 손에 건네는 장면과 같다. 불은 꺼지지 않는다. 다만 손이 바뀐다. 같은 빛, 같은 따뜻함, 같은 생명이 위격을 달리하여 이어진다. 성자께서 육신의 한계 안에서 행하시던 일을, 성령께서 모든 공간과 모든 사람의 내면에서 이어가신다.
예수께서는 보혜사를 가리켜 "또 다른 보혜사"라 부르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한복음 14:16). '또 다른'이라는 한마디 안에 모든 비밀이 들어 있다. 다른 분이시되 같은 사역을 하시는 분, 위격은 구별되나 일하심은 완전히 일치하는 분이다. 성자의 손이 들고 있던 횃불을 성령의 손이 그대로 이어 받으신다.
만약 성자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계속 머무셨다면, 그분을 만나려면 갈릴리로 가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오심으로 인해 그 만남의 자리는 모든 골방, 모든 들녘, 모든 병상으로 확장되었다. 떠남이 만든 빈자리에 보편의 임재가 채워진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일찍이 이 광활함을 노래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시편 139:7구약의 예언자도 이 날을 미리 보았다.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요엘 2:28). 한 곳에 매여 있던 임재가, 떠나심을 통해 만민에게 흘러간다. 이것이 떠남이 유익인 이유다.
우리의 신앙에도 떠남처럼 느껴지는 시간들이 있다. 뜨거웠던 은혜가 식은 듯하고, 분명히 들렸던 음성이 사라진 듯한 침묵의 계절이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닐 수 있다. 한 차원의 임재가 거두어지는 자리에 더 깊은 차원의 동행이 시작되는 문턱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린도후서 3:17).
눈에 보이던 분이 떠나신 자리에, 마음 깊은 곳에 거하시는 분이 오신다. 손을 잡아 주시던 분이 멀어진 것 같은 자리에, 숨결처럼 가까이 계신 분이 임하신다. 떠남은 오심을 위한 자리 비움이다.
오늘 우리의 상실처럼 느껴지는 자리도 어쩌면 그분이 횃불을 건네시는 손짓일지 모른다. 보이지 않게 되심으로 더 가까이 오신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때다.
묵상 질문
1. 내 신앙에서 '떠남'처럼 느껴졌던 시간은 언제였는가? 돌이켜 보면 그 자리에 어떤 새로운 임재가 채워졌는가?
2. "또 다른 보혜사"라는 표현이 내게 주는 위로는 무엇인가? 성자의 사역을 성령께서 이어가신다는 사실을 일상에서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가?
3. 한 곳에 매이지 않으시고 모든 공간에 임하시는 성령의 보편적 임재를, 오늘 내가 머무는 가장 낮고 평범한 자리에서 어떻게 인식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