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 시즌 2 · G01 · EP 1
한 하나님, 세 인격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갈릴리 산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리실 때, 그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씀은 단순한 사명 위탁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정체에 관한 가장 깊은 계시였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태복음 28:19이 짧은 구절 안에 우리 신앙의 근간이 통째로 담겨 있다. 헬라어 원문에서 "이름"은 분명히 단수로 기록되었다. 세 분의 이름들이 아니라, 한 이름. 그러나 그 한 이름 안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나란히 호명된다. 셋이면서 하나, 하나이면서 셋. 여기서부터 우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다 헤아릴 수 없는 거룩한 신비의 문턱에 선다.
구약의 심장부에 새겨진 고백을 먼저 들어보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신명기 6:4유대인의 쉐마는 단호하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런데 신약에 이르러 그 한 분 하나님은 자신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계시하신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마지막 축복을 건넬 때 그 구조가 그대로 드러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린도후서 13:13). 한 축복 안에 세 위격이 함께 호명되지만, 결코 세 신을 부르는 것이 아니다.
초대교회는 이 신비를 정직하게 끌어안았다. 그들은 한 본질(우시아)과 세 위격(휘포스타시스)이라는 언어로 진리를 지켜냈다. 본질에서 하나이시되, 위격에서 구별되신다. 셋을 하나로 뭉개지도 않고, 하나를 셋으로 쪼개지도 않는다.
방 한가운데 세 개의 등불이 켜져 있다고 상상해 보라. 각각 다른 자리에서 빛을 비추지만, 그 방을 채우는 빛은 결국 하나의 환함이다. 빛의 근원은 셋이로되, 우리를 비추는 광채는 분리되지 않는다. 삼위일체는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셋을 헤아리려 할 때 하나를 잃고, 하나로 묶으려 할 때 셋을 잃는다. 이 신비 앞에서 신학은 무릎을 꿇고, 묵상은 비로소 시작된다.
이것이 왜 '신비'인가. 사도 바울이 고백한 대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로마서 11:33). 삼위일체는 우리가 발명한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를 열어 보이신 계시다. 이성이 다 담지 못하나, 믿음이 끌어안는 진리다.
세례는 그저 입교 의식이 아니다. 한 이름 아래 잠기는 사건이다. 우리는 어느 한 위격의 소유가 아니라, 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다. 아침에 눈을 뜰 때, 일터에서 결단할 때, 밤에 무릎을 꿇을 때 — 우리가 부르는 그 이름이 곧 우리의 좌표가 된다.
오늘 하루를 살아내며 묵상해 보라. 내가 누구의 이름으로 살아가는가. 누구의 이름이 내 결정의 뿌리인가. 한 이름 안에 담긴 세 사랑이 오늘 나의 호흡을 붙들고 있다.
묵상 질문
1. 마태복음 28:19의 '이름'이 단수라는 사실은, 내가 하나님을 부르는 방식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가?
2. 다 헤아릴 수 없는 신비 앞에서 내 이성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 거부인가, 경배인가?
3. '삼중 광원의 한 빛' 아래 오늘 내가 내려놓아야 할 분주함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