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 시즌 2 · G09 · EP 9
선한 사마리아인의 실천
예수님께 한 율법 교사가 물었다. "누가 내 이웃이니이까?" 그 물음은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던져진다. 우리는 이웃이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익숙한 얼굴, 편한 관계, 내게 유익을 주는 사람들 안에 갇혀 살아간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이웃은 그 경계 너머에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들은 거룩한 직무를 지닌 자들이었으나, 고통 앞에서 돌아섰다. 반면 사마리아인은 민족도 종교도 다른 낯선 사람이었지만,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자신의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갔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마치시며 물으신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0:36-37예수님은 질문을 뒤집으셨다. "누가 내 이웃인가"가 아니라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는가." 이웃은 미리 정해진 명단이 아니다. 내가 고통을 마주치는 그 자리에서, 내가 누군가의 이웃이 되기로 결단할 때 비로소 존재하는 관계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마음의 따뜻함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성경의 사랑은 언제나 움직이는 사랑이다. 기름을 붓고, 상처를 싸매고, 지갑을 열고, 시간을 내어 주는 구체적인 행위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한일서 3:18사도 요한은 단호하다. 감정만 남아 있는 사랑은 아직 사랑이 아니다. 레위기 19장 18절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고 명령할 때, 그것은 내 몸을 돌보듯 상대의 필요를 돌보라는 실천의 명령이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25장에서 주린 자, 헐벗은 자, 병든 자에게 행한 것이 곧 당신께 행한 것이라 말씀하셨다.
사마리아인이 한 일은 편한 일이 아니었다. 길을 지체했고, 돈을 썼고, 자신의 안전까지 내어놓았다. 이웃 사랑은 늘 불편함을 감수하는 일이다. 내 시간표가 흔들리고, 내 예산이 줄어들고, 내 마음이 흐트러지는 그 지점에서 사랑은 시작된다.
오늘 내가 피하여 지나가고 싶은 그 얼굴, 그 이름, 그 현장이 어쩌면 하나님이 내게 보내신 '내 이웃'일지 모른다.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 말했고(로마서 13:10), 야고보는 이웃 사랑을 "최고의 법"이라 불렀다. 결국 신앙의 성숙은 교리의 깊이가 아니라, 내가 마주친 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용기로 드러난다.
묵상 질문
1. 최근 내가 '피하여 지나간' 얼굴이 있다면 누구인가? 그때 나는 무엇이 두려웠는가?
2. 나의 이웃 사랑은 감정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가,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는가?
3. 오늘 내가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라도 다가가야 할 한 사람의 이름을 적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