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 시즌 2 · G09 · EP 4
70번씩 7번이라도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랍비 전통에서 세 번이면 충분하다 여겼던 시대, 베드로는 일곱 번이라는 숫자로 자신의 너그러움을 드러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모든 계산을 무너뜨렸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태복음 18:22사백구십 번. 이 숫자는 횟수의 상한이 아니라 세는 일 자체를 그만두라는 명령이다. 장부에 선을 긋고 눈금을 헤아리는 마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지. 용서는 한 번의 거대한 결단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매일 아침 다시 붙드는 십자가의 길이다.
우리는 종종 착각한다. "나는 이미 그를 용서했다"고. 그러나 새벽 잠결에, 혹은 무심코 지나친 거리의 풍경 속에서 그 얼굴이 다시 떠오를 때, 가슴 깊은 곳에서 쓴 뿌리가 다시 솟아난다. 용서가 실패한 것일까? 아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가 일회적 감정이 아니라 지속적 선택임을 증명하는 증거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이렇게 권면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에베소서 4:32"용서하라"는 동사는 헬라어 원문에서 현재형이다. 지금 이 순간, 그리고 내일 또 그 순간, 계속해서. 골로새서 3장 13절도 같은 맥락에서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라고 말씀한다. 용납과 용서는 단회적 명령이 아니라 삶의 양식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주기도문을 묵상해 보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태복음 6:12). 우리는 이 기도를 날마다 드린다. 하나님께서 매일 우리를 용서하시듯, 우리도 매일 누군가를 용서하도록 부르심을 받는다.
용서는 감정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감정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손을 펴는 결단이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기억하라.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 이 기도는 고통의 한복판에서 터져 나왔다. 용서는 상처가 아물어서가 아니라, 상처 속에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품을 때 가능해진다. 로마서 12장 19절은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약속하신다. 우리가 움켜쥔 분노를 하나님께 맡길 때, 비로소 빈 손에 평안이 임한다.
오늘도 그 이름을 다시 떠올리며 가슴이 무거워졌다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다. 용서의 새로운 기회가 열린 것이다. 한 번 더, 오직 한 번 더, 주님의 이름으로 마음을 내려놓으라.
묵상 질문
1. 이미 용서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마음에 남아 다시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가? 그 감정을 실패로 여기지 않고, 다시 용서할 기회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2. 주기도문을 드릴 때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부분에서 떠오르는 구체적인 얼굴이 있는가? 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은 지금 무엇을 요청하고 계시는가?
3. 용서를 "세는 일"에서 "사는 일"로 바꾸기 위해, 오늘 내가 내려놓아야 할 한 가지 장부는 무엇인가?